결말을 바꾸는 우리가 되길
ft.〈괴물〉, 《이만큼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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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연초의 분위기를 더욱 감성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영화가 아닐까 싶은데요. 여러분은 요즘 어떤 영화를 보며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최근에 영화 <괴물>을 봤는데 벌써 올해의 영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습니다. 작년 11월에 나온 영화지만 저는 얼마 전 상영이 끝나기 직전에 달려가서 봤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영화 <괴물>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스포를 가득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하시고, 그래도 영화관 상영이 종료된 이후니 이해해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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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괴물>의 해석은 전적으로 제 개인의 것입니다.
열린결말, 해피앤딩일까 세드앤딩일까
영화 <괴물>의 마지막은 세상의 편견을 피해 빅크런치(우주 탄생의 대폭발에 반대되는 개념, 닫힌 우주에서 한 점으로 수축하는 것. 영화에서는 요리가 “고양이가 살아나고 멈춘 열차가 달리고 인간이 원숭이가 되고 공룡이 살아난다” 등의 대사로 표현)를 꿈꾸며 폭풍을 뚫고 자신들의 아지트인 버려진 열차에 탄 아이들(미나토와 요리)의 모습과, 이들을 찾으러 간 미나토의 엄마와 호리 선생님의 모습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빅크런치(태풍) 이후 아이들이 열차 밖으로 빠져나와 햇살을 맞으며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 아이들의 바람이 영화 내내 암시되고 찾는 대상(미나토의 엄마, 호리 선생)과 아이들이 마주치지 않으며, 날씨의 극단적 반전으로 인해 마지막 장면은 새로 태어나기 이전에 있어야 할 ‘죽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아이들이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오피셜로는 살았다고 합니다)
저는 곧 죽어도 해피 엔딩파인데, 아이들이 죽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어쩐지 이 영화의 결말이 해피 엔딩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영화여서이기도, 현실과 맞닿아 있어서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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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관람 포인트 - 의도적으로 줄인 화살표의 크기
제 해석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보통의 우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더 나쁜 놈들을 찾는 데 혈안이었습니다. 스스로 조금 더 나은 인물이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영화 속 더 나쁜 놈을 탓하고 원망함으로써 청렴결백해진 채 영화 밖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영화도 화살표를 만들어 주어 왔고요. 이 사람이 나쁜 놈이고, 이 사람이 착한 인물이니 편들어 주어야 하고, 이 방향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화살표. 이런 정치성이 없다면 관객은 길을 잃습니다. 참고([비평] ‘콘크리트 유토피아’, 우리는 영탁을 부정할 수 없다 (cine21.com)) 이런 것들에 익숙해져 왔으니까요.
이 영화는 다릅니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감상평으로 얘기하는 것이 ‘괴물 찾기를 포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는 모두가 괴물이라고 말하니까요. 화살표를 잃어버린 우리는 혼란에 빠져야 하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영화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화살표의 크기를 줄이긴 했지만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줄어든 화살표는 관객이 길을 잃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어느 한 구석으로 몰아넣어 죄책감을 배우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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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한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합니다. 여기에 영향을 주는 게 영화의 정치성이고요. 우리가 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이입을 하는 대상은 미나토의 엄마와 호리 선생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려 했지만 완벽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의심도 하는 사람들이죠. 폭력을 가하지 않지만 우리는 때로 아이들을 거부하고 미워합니다. 미나토의 엄마와 호리 선생이 가진 이 ‘보통성’이 이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배경입니다. 이외에도 영화는 더 나쁜 가해자의 비조명과 두 번의 반전으로 이 인물들과 동일시하도록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영화는 이 순서대로 우리를 포지셔닝합니다.
1. 진짜 악역을 덜 조명하기
영화는 세 단계로 분리가 가능합니다. 첫번째(영화의 첫 1/3)는 미나토 엄마의 시점입니다. 아들이 선생님에게 학교폭력을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상황이고, 영화도 우리가 호리 선생님을 의심하도록 의도하기 때문에 우린 미나토의 엄마의 편을 들어주며 가장 먼저 감정이입을 합니다.
2. 호리 선생의 무죄
영화의 3/2부터 호리 선생의 시점으로 바뀌면서 호리 선생은 누명을 벗고 우리의 공감 대상 안에 들어옵니다. ‘사실은 죄가 없었다’라는 반전 아래 이는 더 강해집니다.
3. 보통의 인물들이 가져온 나비효과
3/3은 아이들의 시점으로 영화의 비밀, 진짜 메시지가 밝혀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자꾸 엇나갔던 이유는 모두에게 있었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영향을 준 인물이 미나토의 엄마와 호리 선생이었습니다 가장 악한 인물들인 요리의 아빠와 교장 선생님, 학생들은 여기서 아주 조금 비춰질 뿐입니다.
1, 2단계를 통해 우리는 보통의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해버렸고, 더 악한 인물들의 비강조로 인해 명확히 원망할 대상이 흐려진 상태에서 영화는 아이들이 겪은 상처를 계속해서 조명합니다. 결국 3단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죄책감입니다. 다른 많은 영화에서도 우리 모두를 범인으로 지목했었지만 그 차이를 만들어 주는 것이 ‘교장 선생님’의 역할입니다. 영화가 너무 과하게 우리에게 원망의 목소리를 내 거부감을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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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찾기는 그만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의 위태로운 순수함보다 잔인함을 더 잘 아는 사람입니다. 과자도둑과 학교폭력가해자, 거짓말쟁이로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교장선생님은 자신의 손녀를 차로 치었다는 의심을 받지만 끝까지 진실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의미심장한 여러 행동의 진짜 원인도 나오지 않아 모든 건 관객의 해석에 달려있었죠. 화살표가 명확했다면 우리는 그쪽에 죄를 몰아 묻고, 아이들을 향한 연민과 동정으로 감상을 끝냈을 테지만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반대로 완벽히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근히 교장 선생님을 의심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상황에서 늘 있었던 원망의 대상이 없으니까요. 커다란 화살표 대신 작고 은근한 이 화살표가 우리의 거부감을 막는 얇은 보호막의 역할을 합니다. 보호막을 앞에 두고 우리는 죄책감을 배웁니다. 수준에 맞게. 화살표가 향하는 가장 명백한 용의자조차 그 죄가 크지 않고, 보통의 인물이 저지를 잘못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혔으며, 상처를 입은 아이들의 잘못도 드러납니다. 여기서 ‘괴물 찾기는 그만, 모두가 괴물이다’라는 메시지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모두가 괴물이니 괴물이 누구인지 찾는 일이 이 영화에서 무의미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괴물 찾기를 포기하자’라는 문장 아래 그것이 흐려져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을 우리와 같은 선상에 두고 모두가 나쁘니 입을 다물자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학교를 지키며 아이들 곁에 있고 싶어 하고, 미나토와 트럼펫을 불며 자신의 거짓말과 미나토의 거짓말을 함께 두려는 이유는 이것이었을 테죠.
저는 이 영화에서 희망이나 성장을 읽어내려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결말이 비극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영화에서 아이들을 해치는 것은 오래된 편견과 혐오입니다. 이런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래 시간이 필요하고요. 아이들이 엄마나 선생님과의 솔직한 대화가 아닌 빅크런치를 선택한 이유가 어린 나이에도 편견이란 그렇게 강하다는 걸 알아서일 겁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 속에 우리를 조금이라도 더 잡아 두기 위해서 화살표를 흐리게 만든 영화의 의도를 지지하고, 더 나아가 결말이 비극이었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한편으로 너무 이성적으로 변한 건가 싶기도 했는데, 얼마 전 정세랑 작가의 《이만큼 가까이》를 읽고 원인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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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왕 포함이지만 이 책은 2014년에 나왔는걸요...
<괴물>과는 다른 죽음의 의미
이 책에서는 주인공 ‘나’의 첫사랑이 죽습니다. 원인은 총사. 탈영병이 버리고 간 총을 주운 어린아이에게 맞은 총이었죠. 아이의 엄마는 문제적 인물이었고, 삼촌은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이 죽음에도 사회적 문제가 얽혀있지만, 그 대상이 꼭 ‘나’의 첫사랑이었다는 점에서 조금 덜 직접적입니다. 사회가 조금 더 건강했다면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가 어려운, 조금은 극단적 확률의 문제로 보입니다. 책의 내용이 대부분 일상적인 내용이라 ‘갑자기 일상을 침범하는 무차별한 죽음의 공격’처럼 보이고요. ‘너도 그럴 수 있어’라는 문장에서 너, ‘그럴 수 있는’ 집단 안에 이 세상 모두가 포함되는 그런 죽음, 세상에는 모두가 위험 아래 평등하다는 것을 배우게 하는 죽음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여기에서 말하는 메시지는 <괴물>의 것과 조금 다른 것이겠죠.
그래서 이런 죽음에는 신의 자비와 기적 같은 것을 조금 더 꿈꿔봅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나버린 죽음 뒤에는 오지 않은 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작가를 미워합니다. 그 세계에서 작가는 신보다 더 명확히 신이니까요. 글 뒤에 분명히 있는 작가는 진짜 신보다 선명하고 덜 무정해 보이니까 우리는 결말을 바꿔달라 요청해 봅니다. 더 적합한 예시를 들어보면 사회적 문제와 동떨어진 판타지나 로맨스물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전에 <스물다섯 스물하나> 드라마가 종영된 뒤에 시청자들이 크게 항의했던 것도 그렇고요.
굳이 나누어 본 이 두 죽음의 차이는, 바랄 수 없는 것과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요즘 작품들은 사회 문제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 많습니다. 애니메이션조차도요. 이 이야기의 흐름과 결말은 ‘작가만의 것’에서 더 멀어집니다. 현실의 것을 다루면서 현실의 것이 아닌 결말을 내놓는 것은 관객과 제작자의 욕심과 안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공감하는 이유가 그것이 현실의 것이라 그렇다는 것을 잊은 채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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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자율성이나 심미주의도 분명 중요하지만 사회문제를 담은 작품이 점점 많아질수록 우리가 원하는 결말의 모습은 우리가 만들었어야 할 세상의 모습이 아니었을지 물어보게 됩니다. 작품의 해피 엔딩을 요구하는 우리가 조금 더 떳떳한 모습이기를 바라면서 2024년 1월호를 마칩니다. 영화 <괴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정리 안 된 감정들이 뒤섞인 상태에서 생각한 것은 한 가지였습니다. 어른으로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올해도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주세요. 재미없고 지겨운 말이지만 대놓고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점점 길어지는 쇼트레터지만 늘 이 한 문장을 담고 있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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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여행 무작정 따라하기_에밀리아노 리치
‘곧 시작될 우주여행의 우주선 한 자리에 여러분이 앉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행운을 빈다!'
▪️이방인_알베르 카뮈
‘말하자면 내 눈앞에 전차의 긴 좌석이 있고 거기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승객들 모두가 새로 전차에 올라탄 승객을 몰래 엿보면서 웃음거리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_임경선
‘내가 나 자신과 어긋남이 없는 선택을 하기 위해서라면 책임, 노력, 미움받거나 실패할 가능성 등의 여러 가지 대가를 얼마든지 치를 수 있다.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이만큼 가까이_정세랑
‘뉴스의 사상자 명단. 그 파란 리본 위로 이름이 지나가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여기는 간결함 위에 우리의 우정은 이어져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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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레터는 여기까지!
올해도 꾸준히 만나요 :)
발행: 에디터 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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