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감기, 몰아 보기, 스포 포함
분초사회 가속화 현상은 우리의 영상 빨리 감기와 몰아 보기 습관에서 잘 보입니다. 2023년 읽은 책 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책 한 권 꼽으라고 하면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인데요.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고, 이동진 평론가의 유튜브 채널(이동진의 파이아키아)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빅데이터 분석 플랫폼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한국 넷플릭스의 2023년 1월 월간 순 방문자 수MAU는 1,258만 명이었는데, 한 유튜브 채널에서 편집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의 몰아보기 영상 조회 수가 무려 1,381만 회였다(2023년 2월 기준). 요약 영상 하나를 본 사람들의 수가 넷플릭스 한 달 이용자보다 120만 명 더 많았다는 의미다. 『트렌드 코리아 2024』, 142.p
이런 현상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제점이 ‘집중력’일 겁니다. 이렇게 봐서 집중력이 떨어진 것인지, 집중력이 떨어져서 이렇게 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트렌드 코리아 2024』에서도 그렇고 대부분 집중력의 저하를 여유 없는 삶의 문제점으로 지적합니다. 집중력이 원인이자 문제점인 사람들은 오래 무엇을 ‘못’ 보기 때문에 여백을 삭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에게는 집중력을 유지할 만큼 자극적인 것을 볼 때가 가치있는 시간이겠죠.
“재미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여주지 않으면 잘되기 힘든 시대인 것 같아요.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내용을 즐기는 사람들이 줄어든 세상이거든요.”『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이나다 도요시, p.29
어떤 이들은 '어리둥절한 상태'를 없애는 것이 중요합니다. 집중력이 없어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일부러’ 여백을 없앱니다. 이들에게 가치 있는 시간은 ‘앎’의 시간이니 '무지'의 시간을 버리려 합니다. 이렇게 보면 집중력은 큰 문제로 보이고 후자는 나름 자기계발적인 행동으로 보이는데, 정말 그럴까요?
“자연이 만들어 낸 쌍둥이는 엄격하게 동시적이다. 쌍둥이 가운데 한 명은 다른 한 명에게서 자기 자신의 유전 형식의 반복을 보지 않을 수 없긴 하지만, 누가 앞서 살아가지는 않는다. 둘 중 어느 누구도 자아와 가능성의 발전을 선취 당하지 않는다. … 오히려 중요한 것은 생식 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유전자형은 처음에는 모든 것이 미지 상태에 놓여있는 새로움Novum 그 자체이며, 그것의 담지자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존재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 정체가 밝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다방면의 무지야말로 자유의 전제 조건이다.” _ 비동시성과 무지에 대한 권리,『기술 의학 윤리』, 한스 요나스, p.182
“자기와 타인의 이러한 선先 지식은 그가 ‘그 자신’됨의 자발성을 마비시킨다. 세포를 증여해 준, 이미 알려져 있는 –특히 사회적으로 저명한- 원형은 모든 기대와 예언, 희망과 공포, 목표 설정, 비교, 성공과 실패 및 충족과 실망의 기준을 그의 세포를 받은 자에게 미리 알려주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이 모든 것은 자기가 되어가는 자가 서서히 구축해가는 지식이 아니라, 기존의 원형이 가지고 있던 완료된 지식에서 얻어낸 것이다. 이러한 사이비 지식은 이른바 미리 설계된 인간 주체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모든 시도의 직접성,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해 느끼는 삶의 놀라움을 제거해버릴 것이다. 그에게서 모든 것은 현실적인 지식과 참된 진리가 아니라, 사이비 지식과 거짓 진리일 뿐이다.”_같은 책, p.186
우리는 복제인간이 아니라도 요나스가 복제인간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무지에 대한 권리’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제인간이라는 단어만 놓고 봐도 생각나는 문제점과 위험성이 수두룩한데, 그중에서도 요나스는 “일종의 재화로서의 무지에 대한 권리 요구는 새로운 윤리 이론에 속한다”고 말할 정도로 무지에 대한 권리의 보호를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강조합니다. 아무런 인도자도 없이, 준비도 없이 뛰어드는 게 삶이고 그래야 진정한 자유가 보장된다고 말이죠. 이는 집중력을 도둑맞는 것보다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복제인간이 침해당할까 두려워해야 하는 권리, 그중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무지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조금씩 반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일부러 ‘비동시성’을 줄여나가 ‘동시’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 하죠. ‘더 빨리’, ‘순식간에’, ‘단숨에’ 무지 속에서만 가능한 예상이나 예측, 기대를 버리고 결과만을 순식간에 흡수하며 빼곡하게 삶에 앎을 채워 넣습니다. 친절하게도 그걸 바라는 우리를 위해 ‘먼저 가 있는 것들’과 그 수단이 너무 많으니까요.
요나스의 말처럼 이는 진짜 앎이 아닙니다. 직접 느끼며 배워야 할 것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은 오히려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