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스쿠나는 다릅니다.
“너 뭐냐? 인간이 되고 싶었던 거냐? 알고 있어.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지위. 그걸 바라는 거겠지. 알고 있기에 더더욱 시시하군. 무리로서의 인간. 무리로서의 저주. 서로 모여들어 자신의 가치를 재니까 다들 약하고 왜소해지지”
무리로서의 인간. 무리로서의 저주는 집단, 즉 종으로서의 인간 단위를 말합니다. 서로 모여들어 재는 자신의 가치는 종에 속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말하고요. 집단선택설에서 종을 지키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희생도 감수해야 합니다. 내 발전보다 집단 전체의 발전을 바라야 하고요. 그렇다면 개인이라는 가치는 작아집니다. 그러니 다들 약하고 왜소해진다는 말입니다.
“넌 모조리 불태웠어야 했다. 타산도 계획도 없이 닥치는 대로. 고죠 사토루한테 도달할 때까지. 미래도 종도 다 내던지고서... 이상을 움켜쥘 굶주림. 너한텐 그게 부족했다.”
그러니 자신의 성장만을 위해, 개체의 이기적임(고죠)을 따라 미래도 종도 다 내던지고서 나아가야 했다는 말입니다. 이후 스쿠나는 그래도 즐거웠다며 죠고의 강함을 칭찬해줍니다. 그에게 그 강함을 자랑스러워하라고 인정해주죠. 그러자 죠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이건 뭐지?” 자신의 눈물을 보고도 이게 무엇인지 모를 만큼 죠고는 시즌 1부터 이야기가 흘러오는 내내 감정이 없고 냉혹한 캐릭터였지만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어떤 감정을 깨닫습니다. 이는 빌런에게 서사를 만들고 연민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글쎄,.. 나는 그걸 모른다”
죠고를 죽이기 위해서죠. 죠고는 스쿠나를 이길 수 없는 세계관이니 여기서 죽어야 하고, 그 이유를 만들기 위해 죠고는 이 장면에서 스쿠나에 비해 감정적이고 이타적인 캐릭터임이 강조됩니다. 마지막에 스쿠나는 ‘나는 그걸 모른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감정과 이타성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에 도장을 찍습니다. 그리곤 죠고를 불태워버리죠. 스쿠나가 이기면서 주술회전 세계관에서 강하기 위해서는 이타성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더욱 확실시됩니다. 이는 개체선택설의 전제와 같고, 이기적임은 더 강한 캐릭터들의 탄생을 위해 더 강한 이기적임으로 표현됩니다. 이보다 더 이기적일 수 없을 정도로요.
개체선택설은 주술회전의 강한 캐릭터들이 왜 이타성이 없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해줍니다. 그러나 주술회전은 이런 이야기만 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기적인 캐릭터의 대부분은 ‘악’의 무리이고, 선의 무리는 고죠가 봉인되면서 앞으로의 대결은 고죠와 스쿠나의 싸움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누가 더 이기적인지 대결이 아니게 된 것이죠. 현재 선을 대표하는 캐릭터는 이타도리 유지로 스쿠나와 정반대의 캐릭터입니다. 유지의 원동력, 행동의 모든 이유는 이타성입니다. “남을 도와라”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의해 주술사가 되기로 했거든요. 이타성을 의인화하면 이타도리 유지. 유지가 대표 캐릭터가 되면서 선의 무리는 더욱 이타적인 무리가 되었습니다. 이 둘의 싸움은 이타성과 이기적임의 싸움이 될 겁니다. 여기서 개체선택설만 따르며 세계관을 이어가면 당연히 스쿠나의 승리만 남습니다. 악의 캐릭터에 대항하는 다른 이타적 캐릭터들을 설명하고, 승리로 이끌게 하려면 주술회전은 앞으로 다른 논리를 펼쳐야 합니다.
이타성의 진화적 설명
이타성은 진화적으로도 다양하게 설명이 가능합니다. 개체선택설에서는 ‘유전자가 남의 몸에 들어있는 자신의 복사본을 도울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 이기적인 의도지만 결과가 이타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하고요.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잘못된 행동을 하는 서로에게 사회적 존재가 축소되는 기분을 느끼게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하기도 하고요. ‘상호적 이타성’으로도 설명되는데요. 이 또한 자신이 가진 게 넘치게 많으면 이타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만큼 강하고, 상대에게 얻을 이익이 없다면 협력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이 관점에서 보면 더 큰 세계관, 더 강한 캐릭터들에게는 이타성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주술회전은 강한 자들 천지이니 이런 협력성 이타주의로는 캐릭터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쳐 보자. …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에게 이기적 행동을 하도록 지시할지 모르나, 우리가 전 생애 동안 반드시 그 유전자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전적으로 이타적 행동을 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경우보다 이타주의를 학습하는 것이 더 어려울 뿐이다.” _같은 책 p.48
이 책은 분명히 우리의 유전자는 이기적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그 유전자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학습’과 ‘의지’로 이타적일 수 있다는 것이죠. 주술사들은 아마 동료, 친구들의 죽음을 보면서 충분히 이기적임은 나쁘다는 것을 학습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고 유지는 남을 도우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이타적인 캐릭터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진화적 측면을 뛰어넘은 것이겠지요.
이제 진화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끝났습니다. 스쿠나가 현재 게임을 휩쓸고 있지만 악을 대표하고 있는 캐릭터지 않습니까. 결국 모든 작품의 끝은 (작가의 기준으로) 올바른 생각을 가진 캐릭터가 승리할 것이고요. 그러니 앞으로 주술회전은 이타성(인간의 의지)이 강한 유전자, 진화적 전제를 어떻게 이기는지를 설명하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