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제와 관련된 내용은 3권의 잡지에서 찾았습니다. 『바람과 물』, 문학과 지성사의 『문학과 사회』, 민음사의 『릿터』 입니다. 첫 번째로 읽었던 책이 『바람과 물』 2023년 가을호: 생태 영성이었는데요. 하필 주제가 생태 ‘영성’이어서, 종교적인 내용인가 의심을 가진 채 맨 앞에 실린 글만 읽었었죠. 그러니까 『바람과 물』을 읽을 때까지는 이번 주제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그저 이 문장에 밑줄만 그어놨습니다.
동물들을 만나며 그 너머가 보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영적 경험을 하기도 했다. 보이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그때 알았다. ... 그러나 그런 실질적 연결의 감각을 기존 운동의 언어로는 말하기 어려웠다. 느낌, 체험, 경험 같은 것은 전문성이 결여된 감정의 차원으로 이해되었다. 과학과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기후위기의 언어 또한 영적 경험들을 말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_『바람과 물』_14.p
그리고 노트에 이렇게 적어뒀습니다.
‘논리의 시대가 지났나?’
처음에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말은 핑계고 더 이상의 논쟁은 피로하니까 포기하고 다시 감성으로 가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떤 적극적인 형태의 설득이나 타협이 아니라 무시, 논쟁의 여지가 없는 객관적 사실들이니 더 이상 너와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의미의 침묵처럼요. 그러다 『문학과 사회』에서 ‘선험성’이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한편 아무 소리도 표현하지 않는 글자가 있다는 것은, 더욱이 그 글자가 한 언어의 첫 번째 글자라는 것은, 태초의 언어가 침묵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알레프를 포함하는 히브리어 단어에는 ‘아버지’ ‘하느님’ ‘빛’ ‘진리’ ‘믿음’ ‘신뢰’ ‘사랑’ 등이 있는데, 이는 독일의 작가 막스 피카르트가 말했던 선험적인 것의 목록과 대부분 일치한다. _『문학과 사회』_198.p(나의 가장 먼저 지닌 것)
말보다 이전의 것이라는 점에서 『바람과 물』이 말하는 영성과 막스 피카르트의 선험성은 굉장히 닮았습니다. 감각과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요즘 저는 제가 살고 싶은 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장하려면 감정보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서평에도 종종 적곤 했습니다.
“이런 기준들을 통해 삶의 ‘기준’을 배워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 기준을 뒷받침해 줄 근거들이 내 안에 쌓여있지 않다고 느꼈다.”, “내용을 최대한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는데, 이유는 이 수치들의 힘을 얘기하고 싶어서다. 한 사람의 신념이라거나 흥분에 찬 명언이나 표정 묘사로는 이길 수 없는 설득력이 여기 분명히 있다.”
이렇게 저는 이제 막 논리의 시대에 들어왔는데, 요즘 책들이 말하는 것은 더이상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일까요? 제가 갖고 싶어 했던 그 설득력이 감각을 무시하고, 더 효율적임만 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언어만 존재하는 세상에 회의를 느껴 작가들은 때로 침묵이 그것보다 낫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박경리 작가는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은 말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일회용 컵과 같이 풍족하여 쓰고 나면 버립니다. 말 자체도 물질화된 걸까요? 우리는 악마에 의해 모두 사물로 변한 걸까요? 이 영성의 볼모시대를 어떻게 질러나가야 합니까. 이미 말은 기호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현실적으로도 우리 문화가 단절상태에 이른 것처럼 참 많은 말을 우리는 잃었습니다. _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_36.p
합리와, 이성적 근거와, 물리적인 증거가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에 저도 보태며 감각은 무시되고 있었고, 실체에서 점점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며, 감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느끼고 행동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이지 않습니까. 또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감각만이 아니라 ‘있지만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 존재’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은 못 해서든 필요 없어서든, 안 하는 대신 또 다른 방식으로 이들을 적어가는 중입니다. 이는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니까요. 오은 시인의 시(「없음의 대명사」)에서는 그게 호주머니로 표현이 되고요. 우리는 호주머니라는 있음이 들어있던 장소를 바라보며 그 ‘있었던 것’의 감각을 찾습니다.
존재의 본질을 전혀 담지 못하는 대명사를 경제적이라는 이유로 적극 권하는 세계에 순응하며 산다는 것은 결국 고유한 존재의 상실을 용인하는 일이자 대명사가 가리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의 소외를 방임하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것도. 오은은 무엇이 들어 있는 듯 불룩하지만 사실은 텅 빈 대명사를 제목으로 삼음으로써 우리가 거기에 담겨 있는 “없음”을 확인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두드”리게 한다. 두드림 끝에 우리가 최종적으로 꺼내는 것은 그의 호주머니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 우리의 호주머니에 넣어둔 채 잃어버렸던 것들일 것이다. _『문학과 사회』_183.p(호주머니의 시)
이를 표현할 또 하나가 유령입니다. 『릿터』 42호는 그런 유령문학에 대한 내용을 다룹니다.
··· 보이는 것과 잡히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과 잡히는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사유와 행위만이 인정된다. ··· 그렇게 어긋난 지층의 단면으로 출현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유령이라 부른다. 중세와 근대와 현대에 의해 폐기된 것들의 총체, 소문 없이 사라진 것들의 자취와 부활··· _『릿터』_37.p(세상의 잔해 속에서 유령들이 깨어난다)
문학에서 말하는 유령들은 지금까지 살펴봤던 것들을 다양하게 투영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제가 분류한 유령의 이미지는 3가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