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누가 피고인가요?
『이방인』은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이자 유명한 고전인데요. 처음 읽을 때는 왜인지 책 자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이미 너무 선명하다는 느낌이 들어 후루룩 완독하고 얌전히 반납했는데, 이후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실린 리뷰를 읽고 해석의 여지가 여전히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리뷰해봤습니다.
『이방인』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것은 '부조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번 리뷰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이방인(제3자)이라는 단어 자체인데, 이보다 먼저 생각의 시작점이 된 것은 『슬공슬』 의 이 문장 속 ‘토론’이라는 단어입니다.
“작가는 1부에서 뫼르소의 성격과 그가 자행한 사건을 소개하고, 2부에서 그를 이해, 오해하기 위한 법정을 열어 독자와 토론을 벌인다.”(p.139)
카뮈가 우리를 토론 속으로 직접 초대했다고 생각하면 검사와 배심원, 변호사 중 누군가의 입장에 반박 또는 동의하는 방식, 즉 더 나은 정의를 논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작가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을 법한 생각을 각 캐릭터의 입으로 충분히 제시했다면 독자는 토론에서 벗어나 다른 것에 집중해 볼 수 있고,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토론 밖으로 우리를 내몰아 제3자만이 할 수 있는 생각, 관전하는 자의 감정, 조금 먼 시야를 획득해 볼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죠.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나의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을 묻는 일 없이 나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대체 누가 피고인가요? 피고가 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에요. 내게도 할 말이 있어요."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내겐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서 얻는 재미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_『이방인』, 알베르 카뮈, 120-121.pp, 민음사
‘토론 밖의 인물’은 이미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살인죄)을 묻기 위한 법정이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이방인인 주인공 뫼르소. 뫼르소는 이 상황에서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이번 리뷰는 뫼르소가 자신의 인생을 다른 이들이 점령할 때 느끼는 감정, 즉 ‘바깥’의 감정이 이 소설에서 토론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해 보는 방법을 씁니다.
“말하자면 내 눈앞에 전차의 긴 좌석이 있고 거기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승객들 모두가 새로 전차에 올라탄 승객을 몰래 엿보면서 웃음거리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기서 배심원들이 찾고 있던 것은 웃음거리가 아니라 범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고, 어쨌든 그것이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이다.”_103-104.pp
뫼르소가 느끼는 이상함은 우리가 토론 밖에서 토론을 바라볼 때 느끼는 이상함과 닮았습니다. 토론에서 우리가 묻는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 이지만 토론 밖의 우리가 하는 질문은 ‘저들이 하는 게 대체 무엇인가?’가 됩니다. 저 토론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인가? ‘옳음’을 추구하기 위해 하는 말이 맞는가? 저 대화는 필요한가? 말이죠.
같은 3자이지만 뫼르소와 우리는 다릅니다. 훔쳐봄을 당하는 이방인(뫼르소)는 어쨌든 살인이라는 죄를 지어 이상함을 느껴도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를 대신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이상함을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이방인(우리)을 불러 모아 보는 것이죠. ‘그래도 되는가’ 물어봐달라고. 자유와 권리라는 미명하에 폭력이 범람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는 토론에 직접 참여해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이 모든 게 과연 맞는 건지 함께 이상함을 느껴달라는 요청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뫼르소는(우리 사회에서 보면) 명백한 죄를 지었으니 이렇게까지 그를 이해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회에는 3자의 시선으로 지켜봐야 할 사람들이 아직 많습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라고 준 3자의 권위를 자신만을 위해 쓰고 있지는 않은지, 재미를 위해 토론에 참여하고, 말을 나르고, 깎아내고 부풀리고 있지는 않은지. 현실에서 일어날 앞으로의 토론에 참여하기 전, 소설은 토론 밖으로 우리를 내몰아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보게 합니다.
이 토론은 목숨이 달린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태도로 하는 말과 내린 결론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