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믿는 음모론
“옛날옛적에 트랄파마도어에는 기계와 전혀 다른 생명체들이 있었다. … 그리고 이 가엾은 생명체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목적이 있어야 하며, 목적 중에는 좀더 고귀한 목적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했다. 이 생명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보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적처럼 보이는 것을 찾아낼 때마다, 그 목적이 너무 저열하게 보이는 바람에 역겨움과 수치심으로 가득찼다. 그토록 저열한 목적에 따라 사는 대신 이 생명체들은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기계를 만들어내곤 했다. … 기계들은 대단히 정직하게도 그 생명체들에게는 사실 뭐든 목적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생명체들은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목적 없음을 증오했기 때문이다.”_『타이탄의 세이렌』, pp.356-357
『타이탄의 세이렌』과 『제5도살장』은 둘 다 커트 보니것의 작품이고 세계관도 동일한데요. 보니것의 세계관에서 우리는 모두 삶 속에 답과 목적이 있고, 모든 것이 이유가 있으며, 운명대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믿는 ‘바보’입니다. 게다가 그 운명은 아주 대단한 것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죠. 파이아키아에서는 우리가 음모론을 믿는 여섯 번째 이유로 ‘기대와 현실(이상과 나) 사이의 괴리’를 뽑으며 『음모론의 시대』를 언급했습니다. 이 책은 음모론이 삶의 고통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노력이라고 합니다. 『타이탄의 세이렌』에서는 거대한 비밀을 기대하고 목격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을 “산 자들이 삶이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합니다. 풍자의 목적으로 이 말을 하는 보니것에게는 삶에 거대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음모론입니다. 즉, 모든 인간(아마 대부분의 우리겠죠)은 삶의 목적이 대단한 것이라는 음모론에 빠져 있다는 것이죠.
인간은 호박 속 벌레일 뿐
“인류의 역사 자체가 트랄파마도어라는 외계 행성에서 외계인 중 한 명에게 보내는 메시지-교체용 부품의 배송이 늦어진다는 사소한 메시지다-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우연한 사건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인류 전체를 조종하는 트랄파마도어의 외계인들에게 어떤 주체성이나 내재적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기계다. … 기계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 트랄파마도어에 살면서 자신들 중 한 개체인 샐로를 우주 저편으로 보내 메시지를 전달하게 한다. 메시지의 내용은 극비라 샐로조차 모르고 있지만, 알고 보니 무척 간단한 한 마디, “안녕”이다.”_『타이탄의 세이렌』, 옮긴이의 말
인간이 '호박 속 벌레'와 같다며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보니것은 인간이 운명을 믿고, 그 운명을 거스를 수도 있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것이 불필요한 기술의 발전, 전쟁으로도 이어진다고 얘기합니다. 단순히 이 깨달음(인간은 호박 속 벌레)을 얻으면 겸손함이 생기고 세계 평화가 찾아온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담지 않고 있고요. 보니것이 알아낸 유일한 답은 ‘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보니것의 이야기 자체가 음모론처럼 보이지만 모든 게 우연이고 무의미한 곳에서는 음모랄 것도 없지 않을까요. 그랬다면 아마 우주를 가로지르며 전달하려는 메시지로 “안녕”이라는 말 외에 다른 것을 넣었을 겁니다.
“우주 저 끝,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낯선 존재에게 전할 적절한 메시지란 무엇일까? 거창한 의미는 그 내용과 상관없이 거창하다는 이유로 부적절하다. 이 무작위적이고 의미 없는 세상이 주는 허무감에서 탈출하려고 섣불리 만들어낸 의미를 그 존재에게 전달하는 건 폭력적인 일이다.”_옮긴이의 말
인간 위의 존재로 나오는 트랄파마도어인마저 주체성이 없다고 표현되는 상황에, ‘신’이라는 더 위의 존재에 대한 언급은 불필요합니다. 어차피 똑같을 테니까요. 신이라는 존재가 있더라도 그가 뭘 원하는지 알지 못할 테고요. 보니것이 직접 겪은 드레스덴 폭격을 배경으로 하는 『제5도살장』책 설명(『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중에, ‘어떠한 완고한 권위도 거부’, ‘지구상의 모든 권력이 사라졌을 때의 상황’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즉, 우주적 무의미함을 주장하는 보니것의 이야기는 무언가를 믿거나 믿지 않아서도 아니고, 수많은 죽음을 지켜본 사람의 의문과 그 답에 관한 것 같습니다. ‘이 많은 죽음을 감당할 자가 과연 누구일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 그 모든 죽음이 누군가의 조종에 의한 것이고 모두 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면은, 이런 참담한 현실을 만들어 낸 자는 대체 어떤 존재이며, 이걸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보니것은 그럴 존재는 없을 것이라 대답하는 게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희생들이 기꺼이 작용할, 반드시 필요했다고 인정되는 거대한 목적이란 없을 것이라고요.
그러면서 독자를 삶 자체의 무의미함과 허무주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허무한 인생이어도 계속 살아갈 수 있겠느냐 묻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쩐지 마음을 굳게 먹고 허무함을 견디며 살아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또한 모든 권력의 주체를 삭제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을 때 발휘할 수 있는, 우리 손에 다시 쥐어지는 주체성과 적극성이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지고요. 그리고 나면 자극적임이나 더 큰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치중하지 않고 허무하더라도 그게 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