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를 포함합니다.
*해석이 틀릴 수 있습니다.
영화 속 모든 기준이 되는 퓨리오사의 성격
퓨리오사는 어릴 때부터 전략적이고 차분하고 영리했습니다. 납치를 당한 후에도 두려움에 떨기보다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고요. 시타델 탈출의 기회가 올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덕분입니다. 행동으로만 표현되던 퓨리오사 캐릭터는 잭을 만나 언어로 정의됩니다. ‘폭력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
이후 잭과 함께 진짜 탈출을 계획하지만 다시 디멘투스에게 잡힙니다. 퓨리오사는 팔이 묶이고 잭은 끌려다니죠. 디멘투스가 복수의 쾌락에 무뎌져 지겨움을 느낄 때쯤 잭은 죽고, 퓨리오사는 묶인 팔을 자르고 도망합니다. 잭이 죽는 장면, 숨이 끊어지는 장면은 정면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디멘투스에게 그를 살려달라 매달리는 장면도, 유일하게 믿고 의존했던 존재인 잭을 잃은 퓨리오사가 절규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잘린 팔만 나올 뿐이죠. 이 장면이 영화의 기준, ‘절제’를 잘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이 잭이 죽는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퓨리오사에게도 ‘해야 할 행동’(애도)의 책임이 덜어져 절규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아도 냉혈한이 아닌 현명하고 이성적인 캐릭터로 남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서 영화는 잔인함에 몰두하거나 감정의 깊이를 심각한 수준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한 가지 감정에 몰입하기보다 다채로운 캐릭터들과 세계관을 이해하고, 빈곤과 폭력, 황무지에 집어삼켜지지 않고 그저 쏟아지는 엔진의 리듬을 듣게 되죠.
디멘투스에게 복수하는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오래 갈망한 것인지 모를 순간에 서서 뒤엉킨 감정을 쏟아내지만 디멘투스의 숨을 끊어내는 건 한 발의 총알입니다. 이후 퓨리오사가 다양한 방식으로 복수하는 장면은 상상에 불과한 듯합니다. 이런 상황에 할 수 있는 방식들에 대해 모르지 않다는 듯. 응당 잭처럼 끌고 다니다 죽이든, 평생 죽지도 못하게 만들든 어떻게 해야 하는 건 아닐지 고민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듯. 이 장면에서만큼은 복수심에 취해볼 수도 있었지만 영화는 이번에도 퓨리오사의 성격을 따릅니다. 광기와 잔인함이 퓨리오사의 것이 아니니까요. 디멘투스가 말한 것처럼 둘은 닮은 점이 있지만 광기와 쾌락에 중독된 디멘투스와 분명히 분리하는 것도 퓨리오사의 절제성입니다. 인간 이상의 능력들이 디멘투스 및 다른 캐릭터와의 그것과도 수준이 다르지 않더라도 퓨리오사는 ‘연마’한 것이고, 디멘투스는 윤리로부터의 해방, 인간의 삶을 포기한 결과였을 거고요.
“이런 소설들에서는 하나의 캐릭터가 소설의 거의 전부다.《이방인》역시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루어진, 그를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게 관건인 그런 작품이다.”_신형철,《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명확한 캐릭터 설정은 한 작품을 끌어갈 동력이 됩니다. 한 캐릭터의 서사가 전부인 <퓨리오사>는 모든 장면의 흐름 판단이 다 퓨리오사의 성격에 따르고요. 퓨리오사에게 복수가 삶의 전부가 아니므로 앞서 나온 작품이자 퓨리오사의 미래를 보여주는 <분노의 질주>와 속편 이상의 연결성을 지닙니다. 하나의 목표, 하나의 삶이 인물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머니의 땅으로 가고 싶었던 퓨리오사는 <분노의 질주>에서 그 목표를 향해 달리고, 그 목표가 사라진 이후엔 또 다른 목표를 만들어 새로운 삶을 삽니다. 잭과의 연대를 넘어와 맥스와는 더 쉽게 믿음을 쌓죠.
아주 많은 삶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 여러 삶을 살 수 있단 걸 모른다.”
<종이의 집>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해당 편의 제목은 ‘아주 많은 삶’이고요. 한 목표가 사라지고, 내 삶에 전부와도 같은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는 삶이 한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에 빠져 더 살아가지 못합니다. 이야기는 아주 많은 삶을 살아볼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장르입니다. <퓨리오사>를 보고 우리는 퓨리오사의 삶을 살아보았죠. 영화는 편집으로 이를 더 잘 겪을 수 있게 도왔고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현실을 넘어 다양한 삶을 살아보고 나서 다시 현실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지, 어떤 캐릭터가 되어 삶의 매 순간 선택의 기준을 잡을지 결정하는 것을 돕습니다.
“나는 우리가 눈앞의 실제 세계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사실상 100만 년간 기나긴 밤이었던 생물적인 세계로 환원되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것을 원할 리는 없다.”_218쪽, 《명예, 부, 권력에 대한 사색》, 탕누어
종말이나 재난 작품은 세계를 한바탕 뒤집어 재건함으로써 삶의 의지를 불태우거나 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담아냅니다. 또한 판타지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가 다른 건 현실을 다루고 인간의 한계 안에서 표현된다는 겁니다. 멸망의 설정이 특별할 뿐 그 안에 사람들은 여전히 같으니까요. 세계는 그대로 놔두고, 인물들이 삶을 개선해 나가는 내용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가만히 부동하는 세계에서 한낱 인간한테 많은 것을 바라는 듯한 기분이 들 때 저는 오히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찾습니다.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 소설이 세계 정도는 뒤집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뒤집힌 세상에서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혼자 세상을 다시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누구와 연대할 건지 선택하는 것도 어떤 삶이 더 낫고 추구해야 할 삶인지를 고민하는 겁니다. 이 장르는 분명 삶에 도움이 될 겁니다.
모든 게 무너진 세상에서 꿈꾸는 자유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이 아주 작은 것에 집착하고 흔들리며 가치를 변화시켜, 전엔 작게 느껴지던 것들이 실은 작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로써 우리는 세상에 고정된 것이 없다는 그 간단한 사실을 뒤늦게 되새기는 것이다.
… 우리는 지금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갇혀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진실이 많지만, 우리가 진실에 맞게 변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 맞게 변하기엔 세상이 너무 단단해 보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두려운 사람들은 모든 게 무너졌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자유로운 상황에 기대 변화한 우리를 그려본다. 되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으로."_삼시옷, 《성장》
허무맹랑한 설정도 좋습니다. 저는 세상에 썩지 않는 합성 물질이 너무 많아 그걸 먹어 치우러 하늘에서 거대한 지렁이가 내려오거나(<리셋>, 정세랑), 모든 게 무게를 잃고 떠오르는 세상(<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이하진), 좀비 머리를 가져오면 입시와 취업을 위한 가산점을 주는 사회(<좀비즈 어웨이>, 배예람) 이야기도 잘 읽었습니다. 물부족(<고요의 바다>)이나 빙하기, 사막화처럼 환경과 맞닿은 문제라면 또 그 주제대로 반성하고 생각해 볼거리가 많고요. 핵무기로 인한 방사능 누출(<원헌드레드>)이나 끝없는 전쟁에 따른 멸종(《파피용》, 베르나르 베르베르)은 인간의 이기심과 모순, 공동체 합의에 대해 고민하게 합니다. 소행성 충돌(<멜랑콜리아>), 괴물이나 외계인 침공(《잔류인구》, 엘리자베스 문) 등, 아주 많은 삶을 살기에 충분할 만큼 설정은 다양합니다.
인간 이상의 능력치가 있는 캐릭터에 자신을 대입한다고 해도,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 무엇을 지켜낼지 고민하는 과정에 마냥 이기적인 낭만만이 들어있지는 않을 겁니다. 결핍감과 부족한 용기를 채우기 위해 디스토피아 속 히어로를 동경하며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봐왔지만 생각보다 많은 걸 배웠습니다. 현실을 잊기 위해 멀리 떠나도 다시 돌아오면 더 단단히 현실과 연결되었습니다. 이기적이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으로 이 장르를 선택한다고 해도 손에 들어와 남은 것은 처음 생각한 것과 다른 것들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