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 3가 주었어야 하는 답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456번 성기훈(이정재)이 어떻게 게임을 부술 것이냐’, 다른 하나는 ‘프론트맨은 왜 게임을 계속하는가’. 작품의 재미와 기술적 우수함은 몰라도 이 두 가지 과제는 수행했다고 생각합니다.
시즌 3 4화의 마지막 장면에 프론트맨(이병헌)은 성기훈(이정재)에게 게임을 이길 수 있는 아이템을 줍니다. 이어지는 5화에서 프론트맨은 성기훈이 자신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지켜봅니다. 프론트맨은 다른 때와 다르게 조금 여유를 잃고, 긴장한 얼굴을 보입니다. 성기훈에게 한 제안이 프론트맨이 게임 참가자였을 때 오일남(전 프론트맨)이 했던 제안이었다는 게 회상으로 보여지고, 성기훈은 프론트맨과 다른 선택을 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물리적으로 게임을 완전히 부수겠다는 성기훈의 시도는 시즌 2에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방식으로 게임을 부수는 시도를 합니다. 게임을 멈출 수 없는 상황, 게임의 내부에서 성기훈은 게임 주최자의 기대를 배신하는 방법으로 게임을 망칩니다. 복수 칼춤을 바랐던 시청자가 보기에 속이 시원하진 않지만 첫 번째 과제는 끝났습니다.
다음 과제, 왜 게임을 계속하느냐. 게임의 주최자를 두 부류로 나누어보면, 프론트맨과 VIP(투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VIP를 주체로 볼 때 얻을 수 있는 의미는 별로 없습니다. 단지 유희로 하는 게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프론트맨의 경우를 따져보기 전, 비교를 위해 주최자 하나를 더 추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참가자들은 투표를 통해 게임을 진행시킨다는 점에서 주최에 한몫합니다. 참가자들에게 가해지는 돈과 계급의 공격성이 자주 표현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점에서 게임의 생성과 유지가 설명되긴 합니다. 그러나 참가자들이 어떤 투표 결과를 만들든 게임은 속행된다는 점에서 게임을 이끄는 주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게임의 진행 권한은 프론트맨에게 있습니다. 참가자들처럼 빚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고(VIP가 빚쟁이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해도 프론트맨이 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압력을 받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음에도, 동생에게 총을 쏴 떼어내면서까지 왜 이 게임을 계속하느냐. 4, 5화는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게임을 속행해야만 하는 프론트맨
저지른 잘못에서 나오는 공포를 잠재울 방법은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며 벌을 받는 것이지만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세상을 나를 심판할 수 없는 곳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프론트맨은 자신과 똑같은 선택을 하는 인간을 계속 재생산하기 위해 게임을 합니다.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잘못은 보편적인 것이 되고 보편적인 잘못은 죄의식을 낳을 수 없습니다. 프론트맨에게 게임은 자신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넓히기 위한 노력입니다. 프론트맨은 계속 살아가기 위해 게임을 속행합니다.
게임을 하는 동안 자신과 비슷한 선택을 하는 사람을 목격하며 그거대로 안심을 느꼈을 테고, 자신과 다른 이를 변화시켜 세상을 넓히면 정복자의 희열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기훈이 다른 선택을 하려 할 때마다 불안했을 겁니다. 그래서 이래도 다른 선택을 할 것이냐고 협박도 하고 타일러도 보았습니다. 그는 살기 위한 생존 본능으로 게임을 합니다.
작품의 메시지는 그것을 각자에게 적용하고 무언가를 깨달으라는 무언의 압박과 함께 전달됩니다. 그럼 이제 이야기의 극단과 비현실에서 벗어나 비슷한 것을 찾아봐야겠습니다.
나는 계속 살아가기 위해 어떤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는가. 내가 바뀌는 게 아니라 내가 바꾸고 있는 세상이란 어떤 곳인지. 딱히 아주 행복한 일도 아니고 한다고 좋은 가치를 만드는 일이 아닌데도 하고 있는 것. 본능적 쾌락보다는 오히려 악랄한 속내를 표백하고자 하는 두려움으로 만든 이성적 결과물. 그게 무엇인지 고민해 봤습니다.
병들고 우울한 인간이 만드는 세상
쇼트레터는 영상물과 책을 연결하는 글입니다. 유명한 문장을 하나 꺼내봅니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강유원, 《책과 세계》, 살림출판사, 2004, 4쪽)
얼마 전 제 눈에 비슷해 보이는 문장 하나가 더 들어왔습니다. “혹은, 세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울한 인간의 관찰에 스스로를 내맡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수전 손택,《우울한 열정》, 홍한별 옮김, 이후출판사, 2005, 77쪽) 이 문장을 《책과 세계》문장과 비슷하게 바꾸어 본다면, “우울한 인간만이 세계를 관찰한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우울한 인간만이 세계를 관찰한다.”
“읽는다”, ”관찰한다“라는 단어는 이미 만들어진 것을 취하는 행위입니다. 현실의 세계를 만들고 놔두는 부류와 다르게 병들고 우울한 인간은 세상을 말하고 표현하고 진단하는 역할입니다. 다시, 강유원의 《책과 세계》에 이런 문장이 이어집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4쪽)
두 번째 문장을 담은 《우울한 열정》은 현재 절판된 책이라 문장을 신형철 평론가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가져왔습니다. 신형철 평론가는, 우울에 잠식된 인물 저스틴이 사는 곳에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날아와 종말을 맞는 영화 <멜랑콜리아>를 《우울한 열정》과 함께 해석하며 이렇게 씁니다.
“돌이켜 보면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저스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이며(그녀는 무언가를 본다), 프롤로그를 수놓고 있는 움직이는 이미지들 역시 멜랑콜릭의 시선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을 영상으로 구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108쪽)
<멜랑콜리아>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곳은 그림 같습니다. 그러나 종말이 오는 곳입니다. 병들고 우울한 인간이 자신의 시선을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황홀할 만큼 아름답기도 하고, 종말(절망)적이기도 합니다. 이런 해석된 공간을 멋지게 표현하는 사람을 ‘예술가’라고 부릅니다.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예술이 주는 엄청난 가치를 잠깐 눈 꼭 감고 무시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타인이 보는 세계를 왜곡하려는 음모가 있는 사람.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을 늘리기 위해 타인을 설득해 정복하는 사람. 프론트맨과 어느 부분에서 하려는 것이 같은 사람이라고요.
레터 발행을 쉬면서 저는 이런 것들에 빠져있었습니다. 어떤 세계를 잘못 손질해 내보이고 있다는 죄책감. 내 얘기를 듣고 세계를 다르게 보는 사람이 있다는 두려움. 나는 예술가만큼 아름다운 가치를 전달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타인에게 세상은 아주 못된 곳임을 알려주는 사람이라고. 내가 느끼는 위협을 당신도 같이 알았으면 좋겠다며 이야기를 퍼트리는 사람. 이런 내가, 부수거나 덧칠하지 않은 원래 세계란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을까.
프론트맨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세계를 넓히기 위해 공범을 만드는 과정과, 병들고 우울한 인간이 자신이 보는 왜곡된 세계를 타인도 보게 만드는 과정.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여전히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다시 쓰기로 마음을 먹어버린 지금, 개편된 것 없이 비슷한 모양의 글을 써내면서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글을 쓰는 게 저의 불안을 보편화하기 위한 과정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변명은 전부 삼키고 이 말을 하며 줄입니다. 안간힘으로 쓰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습한 날씨를 잘 견디어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