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덥습니다. 매년 여름이면 항상 공기를 으스스하게 만드는 무서운 작품들이 함께 찾아왔었는데요. 어쩐지 올해는 눈에 띄는 작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신 요즘 가장 이슈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처럼 마음을 빼앗는 혼(?)들의 이야기가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데요. 이번 주에 막을 내린 드라마 <견우와 선녀>도 그렇고요. 영혼이 평온한 현실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실은 애처로운 존재라고 말하는 작품은 두려움보다 따듯함을 더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사실 이번 연도는 현실에 찾아온 공포가 컸습니다. 비상계엄부터 잦은 개인정보 유출 사건들까지 심장이 약한 저로서는 더 견디기 어려웠는데요. 이런 불안정에 많은 분이 공감해서인지 <미지의 서울>처럼 잔잔히 응원을 전하는 작품이 더 인기를 끌었던 것 같고요. 작품이 직접 전하진 않지만 각자 체감한 공포가 유달리 컸던 한 해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공포라는 주제를 깊이 생각할 시간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올해 초부터 제가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마음에 두었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함께 할 작품들은 요즘에 나온 건 아니지만 제게 ‘두려움’이란 무엇인지, 그걸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이란 무엇인지 알려준 작품들입니다.
두려움이라는 지옥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는 자살한 주인공(최이재)이 저승사자를 만나고, 사자의 벌에 의해 다른 사람의 몸으로 다시 살고 죽는 것을 12번 반복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 드라마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경험한 자가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를 말하고자 합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지옥>은 시즌 2에서 배우가 바뀌었지만, 작품의 논리는 변덕이 없었습니다. 지옥의 사자가 나타나 사람을 3분간 패고 태워서 지옥으로 데려가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세상. 과학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종교가 대신 설명하고 힘을 발휘하죠. 그중 새진리회 교주인 ‘정진수’라는 인물이 하는 말이 세상을 지배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공포를 알아야 돼. 죄에 대한 공포, 죄를 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공포가 인류를 구원할 거예요.”
잘못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공포에 빠지면 죄를 짓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잘못을 하면 정말로 지옥에 간다고 말입니다. 정진수는 수치심과 죄의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둡니다. 실제로 일어난 현상은 ‘괴물이 사람을 죽였다’뿐이었지만 정진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교리를 퍼트립니다. 정진수의 의도에 따라 사람들은 ‘사자에게 죽임을 당한 자는 죽을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게 되고, 죄의 범위도 해석에 따라 차츰 넓어져 ‘방관도 동조죄’라는 진리가 더해집니다. 지옥사자가 오지 않아도 사람들은 미리 서로를 물고 뜯습니다. 감시하고 긴장하죠. 즉, 재앙을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죄의식(공포)이라는 감정이 지나치게 강해졌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 이 작품의 주제입니다. 실은 자연재해와 다름없이 누구에게나 오는 무차별적 재앙일 뿐인 데도요.
후반부, 지옥사자에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돌아온 박정자와 정진수의 행보를 보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박정자와 달리 정진수는 재생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괴물이 됩니다. 같은 재앙을 겪었어도 각자가 다른 지옥을 경험할 수 있고 괴물이 될지 말지도 나뉜다는 건데, 박정자가 가진 것과 정진수가 가지지 못한 것, 그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이재, 곧 죽습니다>에서 12명의 삶을 살고 죽기를 반복해서 이재가 깨달은 것, <지옥>의 정진수처럼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 이 두 작품이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두려움에 떠는 인생은 진짜 인생이 아니다.” - <이재, 곧 죽습니다>
“당신이 겁쟁이였기 때문이야.” - <지옥>
죄책감을 일부러 밀어 넣는 작품도 많습니다. 정진수의 실험도 극단적이었지만 일리가 있고요. 무지도 죄라는 말처럼 공포에 깨어있지 않으면 인간은 알게 모르게 죄를 지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반성을 하고 긴장한 채 살아간다면 세상은 정말 건강한 곳이 될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런 공포는 쌓이고 삶을 서서히 갉아먹습니다. 공포를 어디까지 느끼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직접 설명하진 않지만 두 작품은 두려움이 어떻게 삶을 파괴하는지 설명하고 있죠. 그래서 공포에 빠지지 않고 삶을 지켜내는 방법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지브리 영화 속 인물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게 중요한 것 외에는 돌아보지도, 마음을 쓰지도 않는 강인함. 타인을 미워하고 복수하는 데 생을 쓸 틈은 없다는 듯 손쉽게 정리하고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사랑뿐이고요. 돌아오는 기차표를 남겨놓지 않고 자신을 괴롭힌 신에게 선뜻 내어주고 부모님께 드릴 쓴 경단을 눈앞의 신을 살리는 데 씁니다. 다 무너진 집을 다시 청소하고 새로 시작합니다. 신(적 존재)에게 인간이 내미는 손길이 있을 때 그들 사이의 위계는 사라지고, 신만큼 인간은 강해집니다. 그러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주변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 강인함이 아닐까요.
종교 소재를 다루는 <지옥>은 광신도의 무서움도 함께 보여줍니다. 무언가를 새로이 믿고 내 안에 가득 담아내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더 이상 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니까요. 우리보다 다른 것을 더 믿으면서 이곳이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박정자와 정진수의 지옥이 달랐던 것도 그 때문이겠죠.
정진수 - “당신은 지금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모르죠? 막, 막 혼란스럽잖아요”
박정자 - “나는 알아요! 내가 누군지, 나는 은율이 하율이 엄마예요. 그 수많은 세계 속에서 나는 항상 그 아이들 엄마였어”
광신도인 아내(햇살 반 선생님)와 그의 남편(천세형), 광신도인 딸과 아버지(진경훈 형사)는 믿음으로 흔들리는 가족을 재현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다시 제자리로 데려오기 위해, 또는 아내를 이해해 자신이 그쪽으로 가기 위해 애쓰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생을 남은 날들을 허튼 데 썼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허망합니다. 결국 남편이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해 깨달은 것은 신을 향한 원망, 또 다른 지옥이거든요.
“알았다, 신의 의도가 뭔지 알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거에 의미를 부여해서 서로 죽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 거기가 어딘지 알아? 지옥이야. 신은 지금 지옥을 이 세상으로 옮기려고 한다!”
남편은 자신을 지켜내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지켜냅니다. 아픈 딸과의 마지막 순간을 아버지는 허투루 보낼 수 없습니다. “희정이 세상은 채 석 달이 안 남았어요. 그 짧은 시간을 희정이 믿음을 부수는 데 쓸 수는 없습니다.”
두 작품이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을 하며 살아가야 하느냐보다는 어떤 것을 놓고 살아가야 하느냐에 더 가깝습니다. 두려움에 빠져서 다른 의미를 찾으려 애쓰다가는 생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라고. 허튼 욕심을 부리다 무엇이 중요한지 잊지 말라고.
사랑의 발명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는 이가 있고, 이 삶이 누군가 간절하게 바랐던 삶이라면 두려워도 계속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럴 때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자주 쓰이지만, 그보다 저는 타인으로 인해 살아야 하는 사람이 되는 작품을 더 많이 봤습니다.
“프레보가 눈물을 흘린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끝장난 거라면 받아들여야지 뭐.” 그가 대답한다. “지금 나 때문에 우는 거라고 생각하나…….”(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2023, 더스토리, 178-179)
《인간의 대지》에서 비행기 사고로 조난된 두 인물은 자기 인생이 끝나는 것보다 남겨질 가족들 생각에 더 슬퍼합니다. 또 이를 대표하는 시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이영광 시인의 <사랑의 발명>.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서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 했다고요. 두려움은 죽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를 차단한 채 내면으로 점점 파고들 때 죽음은 가까이 오죠. 이럴 때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 도움이 될까요.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오히려 나르시시즘이 진정한 사랑을 왜곡한다고 말합니다. 진짜 사랑이란 죽음과 같을 수도, 유일하게 대응할 수도 있는 엄청난 것인데, 그런 사랑은 나를 버려야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말을 인용하고요.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버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에로스의 종말 59쪽에서 재인용)
두려움이 즐길 만한 것이 되지 못할 때. 그래서 외롭고 무서워 내 안에 나를 가둘 때, 오히려 나를 내던지고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산다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잘못될 건지 걱정하는 건 이제 그만하고 사랑만 해보자고요. 어차피 재앙이 온다면 두려움에 빠져 삶을 망치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테니까요.
여러분에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요? 그걸 이겨내기 위해 어떤 모습이 필요할까요. 모쪼록 그 두려움이 진짜 덮쳐오기 전에 대비책이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일단 저는 그런 일이 여러분에게 오지 않도록 간절히 바라고 있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하니까요. 8월도 더위가 그저 더위이기를. 지나친 위협이 아니기를.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