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져야 했던 당신에게
ft.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 Koyoharu Gotoge / SHUEISHA, Aniplex, ufo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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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개봉했습니다. 저는 지난 주말에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온갖 표정을 짓고 눈물을 흘리며 관람을 하고 왔는데요. 이번 <귀멸의 칼날> 무한성 시리즈는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역대급이다’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간 <귀멸의 칼날>은 탄지로를 비롯한 귀살대원들이 귀살대가 되어야 했던 이유를 설명했고, 우여곡절의 긴 수련 기간을 거쳐, 이번에는 최종 보스인 키부츠지 무잔과의 대면을 앞두고 있죠. 상현은 답도 없이 강하고 귀살대 신입 대원들은 바닥부터 차근히 성장하는 바람에 중간 수련 기간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쌓아온 시간이 있기에 감동이 더 커졌다는 것을 이번 편을 통해 여실히 느꼈습니다.
원래 쇼트레터는 작품을 장면 하나하나 뜯어보며 분석한 뒤 나름의 해석을 내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레터를 쓰는 목적이 작품을 더 깊게, 다르게 보자는 의도라 작품이 개봉하고 나서 너무 빠르게 해석을 내놓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많은 분이 원작품을 보기도 전에 내용을 해석하면 그건 다르게 보는 게 아니라 스포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번에도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을 직접 다루기는 어렵지만, 벅찬 감정을 표현하고는 싶고, 또 지난번에 보냈던 ‘주술회전’ 레터와 연결해서 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이번 호는 <귀멸의 칼날>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주제로 가져왔습니다.
저는 취향이 매니악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대중적인 눈을 가졌죠. 그래서 애니메이션도 <주술회전>, <귀멸의 칼날>, <도쿄 리벤저스>, <진격의 거인>, <체인소맨> 등 유명한 작품만 보았습니다. 또 작품 속 모든 캐릭터의 이름을 외우거나 세계관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진 않지만 이 작품들이 유명한 이유나, 이들이 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말씀드린 작품들은 싸우는 이야기, 전투물입니다. 전투물은 투기의 근거가 필요합니다. 이겨야만 하는 이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이유, 두려워서 몸을 떨면서도 상대에게 돌진하는 이유 말이죠. 그 이유가 제대로 설득되지 않는다면 왜 저렇게 열심히 싸우는지, 쟤네끼리 왜 지지고 볶는지, 왜 어림도 없는 상대를 보고도 도망을 안 가는지, 왜 죽여도 싼 상대를 용서하는지 의문이 생기겠죠. 전투물 애니메이션에 ‘감정’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 감정은 주로 과거의 아픔에서 비롯되고요.
주술회전과 귀멸의 칼날의 차이 귀멸의 칼날은 클래식한 방법을 씁니다. 현실, 즉 싸우는 장면이 나오고 중간중간 역경과 한계를 마주했을 때 과거가 침입하죠. 그러면 다시 싸울 명분과 힘을 얻고 현실에서 한 단계를 뛰어넘습니다. 다시 역경을 마주하면 그 구조가 반복되고요. 연상되는 작품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나 <원피스> 쵸파편이 있습니다. 가히 초인의 기억력입니다. 여전히 그 순간에 살고 있는 듯 감정이 고스란히 현실과 이어지죠. 이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무척 강한 캐릭터들이지만 강해진 이유가 과거의 아픔 때문이고, 그 아픔에서 벗어난 날이 하루도 없다는 말이니까요. 아무튼 조금 이성적으로 이 글을 써야 하니 다시 돌아오면, 영화 속 인물과 현실의 인물 간 차이점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귀멸의 칼날>은 이 흐름을 정석으로 따릅니다.
그리고 <주술회전>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지난 쇼트레터 17호에서 다루었습니다. <주술회전> 세계관은 감정적인 자가 지는 세계관이고, 그중 타고난 최강자 고죠 사토루는 누군가를 잃은 슬픔을 전면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죠. 다 너무 좋은 작품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묶어버리거나 별거 아닌 잣대로 구별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지만, 특정 기준에서 보면 이들도 규칙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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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_2021 JUJUTSU KAISEN ZERO: The Movie Project ©Gege Akutami/Sheis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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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형 캐릭터와 성장형 캐릭터 "주인공의 유형은 크게 완성형 주인공과 성장형 주인공으로 나뉜다. 완성형 주인공은 스토리의 시작부터 내적인 완성을 이룬 채 출발하는 주인공이며, 성장형 주인공은 미숙하고 결점이 있는 상태에서 출발해 중심 사건을 통해 성장하고 결말에 이르러 내적으로 완성되는 주인공을 뜻한다."_(《창작자를 위한 지브리 스토리텔링》, 이누해, 동녘, 91쪽)
또한 이 책에서는 주인공에게 세 가지 요건이 있다고 말하는데, 바로 능동성, 유능성, 친밀성입니다. 유능성은 주로 ‘완성형’ 캐릭터가 가진 것으로, 유능한 캐릭터는 처음부터 완벽하고 강하지만 관객과 감정의 거리가 너무 멀어 몰입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하고, 따라서 완성형 캐릭터에 맞는 역경을 잘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친밀성은 이와 대비되는 요건인데, 관객들은 ‘성장형’ 캐릭터에 공감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지만 너무 유능성이 떨어져도 관객이 답답함을 느끼기 때문에 적당한 시기에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하죠.
사례는 많지만, 이번에는 완성형 캐릭터와 성장형 캐릭터에 <주술회전>과 <귀멸의 칼날>을 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캐릭터를 더 선호하시나요? 공감과 응원을 할 수 있는 인물에 끌리는가, 동경과 의존을 할 수 있는 인물에 끌리는가 물으면, 저는 무조건 완성형 캐릭터를 뽑습니다.
사실 한 작품 안에서도 그 둘을 나눌 수 있는데요. <도쿄 리벤저스> 주인공인 하나가키 타케미치는 성장형 캐릭터고 타케미치의 선배이자 그룹의 보스인 마이키는 완성형 캐릭터입니다. 타케미치가 성실하고 진실하고 온몸을 다 바쳐서 운명을 바꾸려는 거 너무 응원하고 잘됐으면 좋겠지만, 불세출의 천재 포커페이스 공주님을 이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성장형 캐릭터의 노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신들의 놀이를 저는 정말 좋아합니다. 완성형 캐릭터가 관객에게 거리감을 준다고 하지만, 그 캐릭터가 뭐 주지 않아도 제 편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거리감을 삭제해 왔고요. 하지만 이번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이런 제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죠. '아픔이 없는 자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작품의 손을 어떻게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나요.
이번 무한성편은 아픔을 다른 힘으로 바꾸는 과정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아픔이 강할수록 캐릭터는 더 초인적인 힘을 발현합니다. 이번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그 변화를 함께 목격했습니다. 캐릭터들이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다른 힘으로 바꾸었는지, 그 힘을 가지고 선과 악 중 어느 곳에 자신을 세웠는지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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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_© Koyoharu Gotoge / SHUEISHA, Aniplex, ufotab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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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져야 했던 당신에게 “그렇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을 평생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18쪽)
“이런 방식으로 모든 불면증 환자들은 이미 고난에서 미덕을 만들었다. 나는 그들 모두가 그들의 고통을 인내하고, 할 수 있다면 치유되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천방지축 살아가며 경솔하게 건강을 떠벌리는 사람들에게는 졸음조차 느끼지 못한 채 누워 비난에 찬 내면의 삶을 견뎌야 하는 그런 불면의 밤을 한 번이라도 보낼 수 있기를 빈다.”(23쪽)
헤르만 헤세 《밤의 사색》에서 가져온 문장입니다.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을 헤아리면서도, 불면의 밤이 주는 영감이 있기에 그런 밤을 한 번은 보내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죠. 저도 잠 못 이루는 밤을 평생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겪는 누군가가 지금 있다고 생각하면 마냥 잘하고 있다고 응원만 하기는 힘듭니다. 어떤 목적에서든요.
이번 호는 아픔을 겪은 모든 분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제가 뭐 되나 싶지만 이런 말 할 때는 뭐라도 되고 싶어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픈 이야기가 몇 개 있습니다. 하나는 이상의 글 중 한 구절인데요. “심지어 그대, 전혀 성장하지 못한대도 상관없다”라는 문장입니다. 아픔이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면, 그냥 아프지 말고 성장도 하지 말라고요. 당신이 아프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요. 이렇게 깊은 마음이 또 있을까 한참을 들여다본 문장입니다.
초인적인 힘 같은 건 영화 속 캐릭터에게나 주고, 가을이 줄 선선한 밤에 쾌적한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애니메이션이 주는 희열과 감동이 다른 것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보기를 원하지만, 한편으로 작품이 주는 감정보다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이 더 나은 것이기를 바라고요. 요즘 바쁘게 지내느라 누군가의 안녕을 진심으로 바랄 시간도 부족했다고, 오늘 이 글을 쓰고는 깨달았습니다. 9월은 고개를 들고 높아진 하늘을 보며 지내려고 합니다. 에어컨 바람이 많이 추웠던 여름이 지나갑니다. 습한 공기가 떠나고 서로를 만질 수 있는 온도가 찾아올 겁니다. 외롭지 않은 한 달이 되겠어요. 건강히,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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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레터는 여기까지!
다음 달에 만나요!
발행: 에디터 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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