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쪼가리 자작
소설은 환상적이고 기이한 분위기에 감싸여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포탄에 맞은 외삼촌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의술로는 절대 살아나지 못함에도 반쪼가리 인간이 되어 다시 등장하면서 현실성을 먼저 삭제시키거든요. 이렇게 돌아온 반쪼가리 자작은 원래 삼촌에서 악한 측면만 담은 존재입니다. 무자비한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죠. 하지만 자작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듭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둔감해서 모르고 있는 자신들의 완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나는 완전해. 그리고 내게는 모든 것들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막연하고 어리석어 보여. … 아름다움과 지혜와 정당성은 바로 조각난 것들 속에만 있으니까.”(《반쪼가리 자작》, 이탈로 칼비노, 민음사, 60쪽)
반으로 나뉘기 전, 자작은 온전했을 때의 혼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반쪽으로 나뉘어 모순과 혼란이 없는 자기 모습에 만족하고, 반쪽이 오히려 완전하다고 주장하죠.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헤매는 불안한 삶 속에서 뱉는 모든 말은 어쩌면 헛소리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까요.
어느 날, 자작의 남은 반쪽이 돌아옵니다. 선함만 가득 담은 이 존재는 나쁜 자작과 반대로 행동하는데요. 아픈 사람들을 돕는 동시에 그들의 영혼까지 치료하려고 하죠. 부도덕한 행동, 방탕하게 즐기던 유희 등 사람들의 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합니다. 나쁜 자작에게 통제를 받아온 사람들은 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죄책감에 시달리고, 급기야 착한 반쪽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감정은 색깔을 잃어버렸고 무감각해져 버렸다. 비인간적인 사악함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비인간적인 덕성 사이에서 우리 자신을 상실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같은 책, 109쪽)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반쪽짜리 인간이 있는 세계관은 아닙니다. 대신 이 소설에서 ‘불완전’으로 설명되는 존재는 덜 큰 인간, 덜 깨달은 인간으로 ‘완전’에 닿고자 수행자들은 오랜 시간 수행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누군가는 어딘가에 도달할 테고, 그는 다른 이에게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하겠죠. 하지만 싯다르타의 논리는 다릅니다. 세상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진리가 될 수 있는데,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정리한 진리에는 모순이 없어야 하기에 일면적인 부분만 설명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렇게 전달된 것은 다 반쪽이라고 말합니다.
반쪽이라는 개념을 다루는 두 작품이 말하는 것은, 무언가 반쪽이었던 두 가지가 합쳐졌을 때 ‘완벽’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합쳐진 하나는 모순과 혼란을 만들죠. 마찬가지로 말과 인간이 합쳐진 ‘켄타우로스’의 모습을 떠올리면 자연스럽진 않습니다. 그러나 각자 다른 두 가지가 만나 오히려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을 제안하기 위해 ‘켄타우로스’라는 인물을 내세운 것이 아닐까요. 둘이 합쳐져 《반쪼가리 자작》은 선과 악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싯다르타》는 세상의 모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얻게 된 것처럼요.
AI와 관련된 논의 말고도, 유독 많은 것들이 극단으로 나뉜 한 해였습니다. 영원히 둘로 나뉘어 존재하면 안 되니까, 하나가 되긴 해야 하지만 그 하나가 다른 하나를 눌러 없애서 얻은 자리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